Subculture/Review

[리뷰] 악의 꽃, 잘 자, 푼푼: 항상성에 저항하는 열사들에게

caez 2026. 5. 16. 00:32

안녕하세요. 오늘은 만화 <악의 꽃>, 그리고 <잘 자, 푼푼>에 대해 얘기해보겠습니다. 두 만화는 모두 어둡고 아픈 성장통을 지독하도록 솔직하게, 그리고 감정적으로 풀어낸 작품입니다. 흔히 멘헤라 만화라고 부르죠.

 

26살이나 되어서 사춘기에 대한 만화를 얘기하는 게 어떤가 싶기도 했는데요, 나이를 먹을수록 더 그래진다는 걸 깨달아버렸습니다.

 

이런 작품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공감을 하는 걸까요. 모든 사람이 제가 겪은 것처럼 지저분하게 자아를 탐색하는 과정을 거쳤다는 건 믿기 어려운 일입니다. 저에게 <푼푼>과 <악의 꽃>은 그러한 격동의 인정이고, 상처입은 저를 위한 위로이고, 타인을 상처준 저에 대한 질책이었습니다.

 

악의 꽃은 2007년, 푼푼은 2009년 작품입니다. 이 시대 사람들도 고생이 많았구나 하는 생각이 드네요.


잘자푼푼과 악의 꽃의 시종은 서로 닮아있습니다. <잘 자, 푼푼>의 푼푼은 불우한 가정 속에서 아이코를 만나서, <악의 꽃>의 다카오는 브들레르의 시집인 <악의 꽃>에 심취해 있다 나카무라를 만나서 모든 것이 시작됩니다.

타나카 아이코와 오노데라 푼푼 (잘 자, 푼푼) / 나카무라 사와와 카스가 다카오 (악의 꽃)

 

그리고 두 작품은 동일하게 주인공이 과거의 굴레에서 벗어나, 삶의 새로운 분기에 접어들며 끝을 맞이합니다. 그러나 사춘기가 지나도 인생은 계속되듯이, 이야기는 이러한 물음을 흘리고 지나갑니다. 정말로 아이코와 나카무라를 끊어내는 걸로 괜찮았을까요? 사치와 토키와에게도 푼푼과 다카오가 구원이었을까요?

난죠 사치(잘 자, 푼푼) / 토키와 아야(악의 꽃)


 

푼푼은 착한 아이였습니다. 푼푼이 푼푸니아에 대해 점점 잊어버릴수록, 제 마음은 반대로 쥐가 나는 것처럼 저려옵니다. 푼푼도 처음부터 진흙탕 속에 머물기를 고집했던 건 아니었습니다.

 

푼푼의 주변은 푼푼을 정말 징그러울 정도로 늪으로 끌어내리고 싶어합니다. 항상 괜찮은 척 시침을 뗐지만, 그건 괜찮지 않은 자신을 받아줄 곳이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가본적도 없는 카고시마에 집착했던 이유도, 그곳에는 아이코와 둘만의 장소가 있을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요.

 

아무튼 푼푼은 점차 현실을 회피할 줄만 아는 사람이 됩니다. 아이코와 약속에 나가지 않고, 탈피를 위해 카니에를 이용하고, 이런 나를 받아들여준 사치를 등한시하고, 마지막까지 엄마를 용서하지 못했죠. 꼬리를 쫓는 개처럼, 자신을 가엾게 여기기 위해서 혐오스러운 자기자신을 만들어내는 행위를 반복했습니다.

 

싱클레어는 계속해서 데미안에게 구해졌었죠. 푼푼은 사치에 의해 굴레의 늪속에서 건져집니다. 늪속에 무얼 두고 왔는지 생각해보면 마냥 개운하지는 않지만 말이죠. 푼푼의 이런 세련된 연출과 섬세한 감정선 뒤에는 헐벗은 외설과 폭력이 있습니다. 이야기가 고조되면서 정말 이래도 되나 싶은 장면이 많이 나왔는데요, 표현의 자유란 대단한 것 같습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이 만화가 많은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는 만화는 아닌 것 같네요.

 

푼푼의 인생에 막이 하나씩 내릴 때마다, 푼푼은 눈꺼풀 뒤에 스스로를 숨기고 안심시키듯 속삭입니다. "잘 자, 푼푼"


 

<악의 꽃>에서 가장 의문인 점은 나카무라의 행동원리입니다. 이렇다할 맥락없이 맹목적으로 관성과 수렴에 저항하죠. 그래서 나카무라는 '악의 꽃' 그 자체입니다. 미지근하고 끈적한 자의식. 해소되지 않는 저편에 대한 잠열. 나카무라는 이야기가 끝날 때까지 순수한 악의 꽃으로 남아있습니다. 우리는 다만 그녀가 보는 세상을 통해 그녀가 느끼는 근원적인 혐오를 엿볼 수 있습니다.

다카오를 만나면서 나카무라의 세상이 선명해진다.

 

악의 꽃에서 주인공들은 서로를 나를 '저편'으로 데려다 주고 나를 완성시켜 줄 퍼즐조각으로 여깁니다. 생물이 항상성을 지니듯 서로를 통해 안정된 상태로 돌아가고자 합니다. 다카오는 나카무라의 그런 마음을 이해하고 그렇게 되기 위해 행동했습니다. 그녀가 갈구하던 '저편'이 자신의 안에 있다는 걸 알려주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나카무라는 '저편'에 도달한 자신을 용납할 수 없었고, '저편'의 그녀는 다카오가 자신에 의해 망가지는 걸 용납할 수 없었습니다. 그렇기에 그녀는 항상 마지막에 가서는 그를 밀어냅니다.

 

토키와는 다카오에게 있어서 가장 적절한 사람이었습니다. 강인하고 이해심이 넓으면서 서로의 세계를 공유할 수 있는, 다카오가 온전히 담아질 수 있는 모양의 그릇같은 존재입니다. 그러나 토키와에게 다카오가 어떤 사람이었는지는 살짝 물음표인 부분이 있습니다. 둘은 토키와의 소설을 매개로 서로를 이해했지만, 저는 그 소설의 내용을 모르니까요. 마지막 해변 장면에서 다카오를 놔주려했던 것도 그렇고, 토키와에 대한 해석은 여지가 상당히 남아있는 부분입니다.

 

오시미 슈조는 악의 꽃에서 다양한 사랑의 형태를 포착해냅니다. 인물들은 너의 줄기와 지엽을 생각하고, 서로의 피부를 기워내어 채워지고, 휘발되는 순간에 외로워지고, 두 번 다시 만나지 않기로 약속합니다. 그럼에도 읽는 사람은 행동에 내제된 동일한 사랑의 원리를 느낄 수 있는 탁월한 설계입니다.

 

다카오는 과거의 '유령'을 죽이고, '악의 꽃'을 받아들여 '저편'을 쟁취해냅니다. 저에게는 <악의 꽃>의 결말이 더 좋아하는 마무리입니다. 여운에 젖어 있는 동안에는 뭔가 저도 다카오처럼 용감해질 수 있을 것 같거든요. 현실은 여전히 허섭스레기 같지만 그건 다카오도 그렇잖아요. 반드시 필요할 때는 부풀어오르지만 잔뜩 연소하고 나면 다시 푹 꺼져버리는. 이런 해석까지가 오시미 슈조 선생님이 지시한게 아닐까 하는 느낌도 받아봅니다.